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스샹달 전투 (문단 편집) === 변덕스런 날씨 === 1915년에서 1918년까지 영국원정군(BEF)의 정보부에서 활동하던 존 차터리스 준장은 1929년 저서 "야전원수 헤이그백작"에서 지난 80년간 기후를 분석한 결과 파스샹달 전투가 일어날 당시 인도 몬순 기후의 영향으로 근 30년 간 파스샹달 지역의 날씨가 점차적으로 습해졌다고 주장했고, 1차 대전 당시 영국 수상인 로이드 조지나 리델 하트 등 당대 1차대전을 경험한 이들이 많이 이 부분을 인용했다. 한편 1915년 영국 원정군이 기상학자 어니스트 골드의 지휘하에 기상청을 설치한 이래로 1917년 말 16명의 장교와 82명의 병사들이 근무하고 있었으며, 이들의 기록을 종합한 결과 차터리스의 주장과는 반대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. 1989년 필립 그리피스는 1916년 이전 플랑드르 지역의 날씨를 조사한 결과 큰 특이사항은 없었다고 말한다. 프랑스 그리네 곶에서 조사한 1913년부터 1916년까지 당시 플랑드르 지역의 기후를 보면 당시 8월 중 건조한 날이 각각 26일, 23일, 23일, 21일이었고 1901년부터 16년까지 8월 날 중 약 65%의 날씨가 건조한 것으로 나왔다. 그러나 1917년 8월은 127mm에서 84mm에 이르는 강우가 8월 1일, 8일, 14일, 26일, 27일에 걸쳐 내렸고 이것을 말릴 해는 뜨지도 않고 바람도 거의 안 불었다. 작전 당일에도 희미하게 나마 12.5mm의 작은 비가 내렸으며 8월 동안 딱 3일만 비가 안내리고 14일의 경우 1mm이하의 비가 미세하게 내렸다. 그리고 그 비가 안 온 유일한 3일도 해가 거의 비추지 않았다. 이 모든 악조건이 매일의 참상으로 벌어지는 와중에도 헤이그는 8월의 비는 내려도 햇볕과 바람이 이를 말릴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. 헤이그는 이프르가 대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장소라고 맹목적으로 결심했지만 최전선을 한 번도 시찰하지 않았다. 그리고 플랑드르의 진흙탕에 대한 휘하 정보 참모 부서의 경고를 무시했다. 이프르에 대한 헤이그의 확신을 가진 이들은 헤이그 외에 아무도 없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